2022. 4. 24.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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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너 뭐 고민 있어?
열매 박스의 재고량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돌아온 지나의 말 한마디가 오늘도 그의 동생에게 강렬하게 처박힌다. 닦고 있던 시몬열매를 떨어뜨렸군. 이 자식이, 그건 니가 처먹어라. 그와 닮은 구석이라곤 얼굴뿐인 남동생은 요새 아주 들떠서 흔들풍손마냥 사람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 하더니, 오늘은 답지않게 심각했다. 설마... 차였나? 벌써? 저번처럼 놀아난 건 아닌 것 같더만. 아냐, 그럼 역시 더 죽상이겠지. 설명해준 대로면 그럴 상대도 아닌 것 같았고. 아니, 그럼 히죽거리면서 여자친구랑 연락이라도 하던가. 웬걸 오늘은 일 끝나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쇼핑 사이트를 뒤지고...
- 아, 아니...! 그, 그건 아니고…. 저기, … 누나, 그….
잠깐. 지나는 이 순간 나쁜 촉을 느꼈다. 괜히 물어봤나? 남동생의 연애사정을 듣게 될 것 같아. 젠장. 듣고 놀려먹고는 싶지만 진지하게 상담해주고 싶지는 않은 정도의 컨텐츠인데. …에휴. 듬직한 사남매의 장녀는 결국 오늘도 남동생의 뻘짓에 조금 나서주기로 했다. 그래, 그래서 뭐라고. 곧 여자친구가 생일? 그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일날 약속은 잡았고? …뭐야, 안 물어봤다고?
- 장난하냐?
- 호호, 지나가 또 화가 났네~
멱살잡이 중인 남매의 어머니가 아주 익숙한 듯 그 풍경을 보며 웃었다. 아, 아니, 그치만 원래 항상 매일 만나니까...! 깜빡했어...! 미약한 남동생의 외침은 어이가 가출한 지나에게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지우야, 준아.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모두 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라 바라신 것은 알지만 이 녀석은 역시 좀 과하지 않나요. 그 자리에서 다급하게 애인의 생일날 저녁을 겨우 쟁취하는 남동생을 보며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뭘 어렵게 생각해? 너희 사귄 지 한달도 안 됐잖아. / 그, 그렇지... / 그럼 그냥 얼굴만 보고 있어도 실실 좋을 텐데 그냥 같이 잘 놀면 되지. 그 친구가 좋아하는 거 정도는 알고 있을 거 아냐, 넌. / 그치만... 생일이잖아... 더 특별한 날이라고. 가장 좋은 걸 해드리고 싶어... / (지는 맨날 케이크 같이 먹으면 그걸로 된다고 하면서) / 왜 그렇게 봐... / 아니, 새삼 이래서 어떻게 잘도 애인이 생겼다 싶어서... / 왜 시비야...?!
대략 네다섯 줄 정도 쓸데없는 대화를 한 남매는 지나가 골비람에게 간식을 챙겨주러 떠남과 함께 끝을 맞이했다. 단순한 말 한 마디, 바닥에 떨어진 시몬열매를 씹는 소리와 함께.
***
- 에셸 씨! 오,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 주노 씨~ 후후, 그럼요. 그치만 주노 씨를 만나는 시간도 계속 기다렸는걸요.
오늘의 데이트는 전부 맡겨달라고 했던가요?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는 서툴게 고개를 끄덕여보였고 천천히 손을 잡았다. 오늘도 부드러운 손이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같이 돌아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여전히 서투른 목소리를 겨우겨우 꺼내며 연인의 작은 손을 이끌었다. 택시에 올라 변하는 바람의 향을 만끽해도 나쁘지 않았겠으나, 모두에게 사랑받느라 바쁜 아가씨의 생일은 분명 아침부터 바쁜 스케줄이었을 테다. 그 마지막 시간을 차지한 자신은 그만큼의 에스코트를 해내야겠지. 그러니 눈 깜빡, 노란 여우를 곁에 둔 그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나면 어느새 풍경이 달라지는 것이다. 둔치의 바다 냄새는 어디 가고 허브와 과실의 향이 뒤섞인 마을을 배경으로 두고 그는 수줍게 웃었다. 몇 안 되는 장소들이지만, 에셸 씨가 보고 싶다고 한 곳들에 가요. 즐거우면, 좋을 텐데….
누림은 그의 홈그라운드였지만 고요함이 두 사람과 함께 거닐었다. 혹시 다리가 아프면 이야기해요, 혼자 다닐 땐 한 번도 의식한 적 없는 흙길에 괜한 걱정을 건넸다. 단단히 잡은 손은 상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선명하다. 산책 동안 그는 간간히 짧은 인사를 나누는 때도 있었고 데이트냐며 들뜬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소란스럽다’고 하기엔 결이 달랐다. 그의 고향은 북적스럽지 않았으며 쏴아아 울리는 나뭇잎 소리가 한결같았으니. 산책 코스는 짧았다. 처음으로 갔던 작은 학교, 카페 허브티로 가는 가장 편한 길, 누나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창고, 여동생이 좋아하는 잡화점, 아버지가 비료 고르는 법을 가르쳐 준 가게. 대뜸 풀숲 하나에 다가가 그 안을 가리키자 치코리타 몇 마리가 빼꼼 얼굴을 내민 것도 보았다. 어머니가 돌보는 야생 치코리타들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이름은 모두 나비였다. 제가 지은 건 아니에요….
짧은 산책이 끝나갈 때 즈음, 상대를 이끌어 길가의 벤치에 앉고는 그는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제법 어렸을 때, 모르는 길을 걷는 걸 꽤 무서워했어요. 부모님이나 누나들이 앞서서 길을 찾아주지 않으면 모르는 곳에 가 닿아서 혼자 있게 될까봐 무서웠거든요. 이제는 눈 감고도 돌아다닐 정도가 되어버렸지만... 녹색 잎이 노을의 색을 받아 주황빛으로 빛나기 시작해도 상대는 이런 시시콜콜한 그의 이야기를 즐거운 듯 들어주었다. 여전한 미소가 그렇게 좋았더랬지. 당신의 생일인데 이런 코스, 괜찮은 걸까 하고 고민이 드는 것은 필연적이었지만.
- 있잖아요, 사실, 오늘 뭘 해야 할지. 엄청 고민했어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가장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 줄 수 있을 만큼 멋진 아이디어는 생각나지 않았어요. 이곳저곳 물어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는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냥, 제가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에셸 씨가 좋아하거나 바랐던 일을… 해주라고 해서. …있잖아요, 저는 옛날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에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엔 너무 평범한 하루 투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냥 흘려 보내고, 그냥 적당히 잊어버리면서. 그치만, 에셸 씨가 궁금하다고 해 줘서. 같이 알고 싶다고 해 줘서, 저도 익숙함 위에 새로운 설렘을 느꼈거든요. 에셸 씨는 제 하루들을 특별하게 만들고 지나간 날조차 빛나게 만든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 에셸 씨를 따라하면 저도 당신에게 더 특별한 하루를 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둘만이 아는 낭만적인 비밀기지가 없는 건 안타깝기는 한데. 그 하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려는 듯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제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하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분홍색 리본을 풀어내면 라벤더 꽃과 리본 모양의 작은 장식이 달린 실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장신구 가게에서 ‘여자친구분께 선물하시려고요?’ 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만 같은 무난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
- 생일 축하해요, 에셸 씨.
- 에셸 씨 덕분에 오히려 제가 매일매일 선물을 받은 것처럼 특별한 하루가 돼요.
- … 저도, … 에셸 씨께 그런 사람이 될게요…. 앞으로도, 계속요.
특별한 하루를 위한 각고의 노력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전해지고, 이은 공백을 채우려는 듯 또다시 쏴아아, 하는 녹빛의 소리가 들렸다. 저녁식사는 직접 해 드릴게요. 케, 케이크도… 준비했는데… 그… 물론 둔치의 레스토랑으로 전향해도 정말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주세요…!
늘 있던 일상을 닮은 특별한 하루였다. 마지막에 덧붙인 구차함까지 합쳐서.